나는 올해 49살이 되었고, 4개월만 지나면 나이 오십에 ‘지천명’이 된다. 눈 한번 지그시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하늘의 뜻을 알아 그에 순응한다는 나이라니 세월이 화살과 같다는 어르신들 말씀이 실감 난다.
나는 42살이라는 숫자에 유독 민감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89년 7월, 아버지는 병마와 싸우시다 젊디젊은 42살이라는 나이에 생때같은 자식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고작 고등학교 1학년 17살이었다.
산 사람은 살아진다고 20대를 지나 결혼도 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평범한 대한민국 중년의 모습으로 배도 좀 나오고 사는 것도 안정되어 큰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고만고만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배운 것 없어 고생만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나은 삶이라 자부했다.
그러함에도 한 번씩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버지 나이만큼 살 수 있을까. 내 아이가 나처럼 아버지라는 든든한 가림막 없이 오롯이 비바람을 맞으며 혼자 고민하고 번복하고 결정해야 하는 힘든 시간을 또 겪지 않을까.’ 라는 생각들이 휘몰아쳐 내 마음속 몰래 숨겨놓은 '어른아이'를 흔들어댄다. ‘나는 잘살고 있다. 아버지가 있는 사람들처럼 아니 그보다 더 괜찮다.’ 라는 다짐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그때마다 가족들 몰래 쿵쾅대는 마음을 부여잡고 스스로 일어나야 했다.
마음이 어지러운 날엔 아들이 보고 싶어진다. 새벽에 방을 열어보면 그때의 나보다 커버린 아들 녀석이 꿀잠을 자고 있다. 아버지 나이가 되던 그해, 42살의 나는 아들과의 시간을 더 많이 보내기 위해 자투리 시간도 십분 활용코자 노력했던 것 같다. 지금은 대학 진학으로 함께 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여 양보다는 질로 아들에게 아끼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신혼일 때 장모님이 나의 부모님이 궁금하셨는지 호기심에 물어보셨다.
“자네는 아버님과 가장 좋았던 기억이 무엇인가? 어머님 모시고 같이 어디 놀러 갔던 건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공장일에 매일 매일 바쁘셨던 아버지와 어디 놀러 갔던 기억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 대신 생일날 밤늦게 귀가하시며 어딘가 이름 모를 제과점에서 들고 오시다 다 찌부러진 케익이 생각났다. 가족들과 함께 제대로 된 케익은 언제 먹을 수 있냐며 웃었던 행복한 기억이다. 사진을 보면 기타도 치셨던 것 같은데 그런 기억은 아쉽게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들이 사춘기가 되어 나와 아내도 성장통을 겪으며 힘든 시간을 보내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청소년 양육서를 읽어 보았다. 아버지가 중3 말에서 고1 때 까지 투병을 하신 터라 나는 제대로 된 사춘기를 보내지 못하고 성장통을 겪지 않은 채 20대의 성인이 되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결정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방황하는 아들을 위해 나는 더 많이 사랑하고 표현하는 아버지가 되어 보자고 결심했다. 만약 그때 그 시절에 곁에 계셨다면 나에게 해 주셨을 당신의 모습과 말투를 상상하며 서투르지만 진짜 아버지가 되기 위해 진심을 다해 아이에게 집중하고 표현하고 사랑하려 노력했다.
먼저 아내를 데리고 집을 나와 아이의 변화를 인정하고 성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착하디착한 우리 아이가 갑자기 이상하게 변해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책을 통해 학습하고 가슴으로 체화하고자 서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들의 정서적인 독립을 지지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힘든 시기를 응원하고 또 응원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우리 가족은 조금은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삶의 힘든 순간마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린아이들을 남겨놓고 눈을 감았던 부정을 생각하면 가슴 속에서 애끓는 소용돌이가 울렁인다. '아버지라면 어땠을까?' 라고 계속 되묻고 대입해보다 보면 한 남자이기도 한 아버지의 인생이 참 애달프고 서글프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그토록 살길 원하셨던 못다 한 귀중한 인생을 더 길게 살아내고 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렇게 원했던 순간순간을 내 눈에 담고 손으로 만지며 머리에서 추억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소망해 본다. 나의 아이가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가 될 때까지 욕심이지만 지켜보며 절대적인 응원을 해 주고 싶다.
더 많이 사랑하고 표현하던 아버지로 기억되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해 내 삶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히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시대에 나처럼 힘을 내 치열하게 살고 있는 모든 아버지들에게도 힘내자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올해 49살이 되었고, 4개월만 지나면 나이 오십에 ‘지천명’이 된다. 눈 한번 지그시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하늘의 뜻을 알아 그에 순응한다는 나이라니 세월이 화살과 같다는 어르신들 말씀이 실감 난다.
나는 42살이라는 숫자에 유독 민감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89년 7월, 아버지는 병마와 싸우시다 젊디젊은 42살이라는 나이에 생때같은 자식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고작 고등학교 1학년 17살이었다.
산 사람은 살아진다고 20대를 지나 결혼도 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평범한 대한민국 중년의 모습으로 배도 좀 나오고 사는 것도 안정되어 큰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고만고만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배운 것 없어 고생만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나은 삶이라 자부했다.
그러함에도 한 번씩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버지 나이만큼 살 수 있을까. 내 아이가 나처럼 아버지라는 든든한 가림막 없이 오롯이 비바람을 맞으며 혼자 고민하고 번복하고 결정해야 하는 힘든 시간을 또 겪지 않을까.’ 라는 생각들이 휘몰아쳐 내 마음속 몰래 숨겨놓은 '어른아이'를 흔들어댄다. ‘나는 잘살고 있다. 아버지가 있는 사람들처럼 아니 그보다 더 괜찮다.’ 라는 다짐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그때마다 가족들 몰래 쿵쾅대는 마음을 부여잡고 스스로 일어나야 했다.
마음이 어지러운 날엔 아들이 보고 싶어진다. 새벽에 방을 열어보면 그때의 나보다 커버린 아들 녀석이 꿀잠을 자고 있다. 아버지 나이가 되던 그해, 42살의 나는 아들과의 시간을 더 많이 보내기 위해 자투리 시간도 십분 활용코자 노력했던 것 같다. 지금은 대학 진학으로 함께 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여 양보다는 질로 아들에게 아끼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신혼일 때 장모님이 나의 부모님이 궁금하셨는지 호기심에 물어보셨다.
“자네는 아버님과 가장 좋았던 기억이 무엇인가? 어머님 모시고 같이 어디 놀러 갔던 건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공장일에 매일 매일 바쁘셨던 아버지와 어디 놀러 갔던 기억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 대신 생일날 밤늦게 귀가하시며 어딘가 이름 모를 제과점에서 들고 오시다 다 찌부러진 케익이 생각났다. 가족들과 함께 제대로 된 케익은 언제 먹을 수 있냐며 웃었던 행복한 기억이다. 사진을 보면 기타도 치셨던 것 같은데 그런 기억은 아쉽게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들이 사춘기가 되어 나와 아내도 성장통을 겪으며 힘든 시간을 보내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청소년 양육서를 읽어 보았다. 아버지가 중3 말에서 고1 때 까지 투병을 하신 터라 나는 제대로 된 사춘기를 보내지 못하고 성장통을 겪지 않은 채 20대의 성인이 되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결정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방황하는 아들을 위해 나는 더 많이 사랑하고 표현하는 아버지가 되어 보자고 결심했다. 만약 그때 그 시절에 곁에 계셨다면 나에게 해 주셨을 당신의 모습과 말투를 상상하며 서투르지만 진짜 아버지가 되기 위해 진심을 다해 아이에게 집중하고 표현하고 사랑하려 노력했다.
먼저 아내를 데리고 집을 나와 아이의 변화를 인정하고 성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착하디착한 우리 아이가 갑자기 이상하게 변해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책을 통해 학습하고 가슴으로 체화하고자 서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들의 정서적인 독립을 지지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힘든 시기를 응원하고 또 응원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우리 가족은 조금은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삶의 힘든 순간마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린아이들을 남겨놓고 눈을 감았던 부정을 생각하면 가슴 속에서 애끓는 소용돌이가 울렁인다. '아버지라면 어땠을까?' 라고 계속 되묻고 대입해보다 보면 한 남자이기도 한 아버지의 인생이 참 애달프고 서글프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그토록 살길 원하셨던 못다 한 귀중한 인생을 더 길게 살아내고 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렇게 원했던 순간순간을 내 눈에 담고 손으로 만지며 머리에서 추억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소망해 본다. 나의 아이가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가 될 때까지 욕심이지만 지켜보며 절대적인 응원을 해 주고 싶다.
더 많이 사랑하고 표현하던 아버지로 기억되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해 내 삶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히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시대에 나처럼 힘을 내 치열하게 살고 있는 모든 아버지들에게도 힘내자고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