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향한 곳은 집이 아닌 병원이었다. 그렇게 도착해서 병상의 아버지와 나눈 대화의 방법은 종이와 펜을 통해서였다. 의료장비로 기도와 입을 고정시켜 놓아서 아버지는 말씀을 못 하셨다. 그래도 작은아들이 왔다는 것, 아들을 보고 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매우 반가워하셨고, '집 어디 어디에 가면 너 좋아하는 곶감이 있다.'는 밝은 언어로 나를 안심시키셨다.
나는 행복하게도 아버지와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고, 모든 좋은 일과 고민을 이야기하고 지낼 만큼 살가운 관계였다. 그러다가 내가 외국 생활을 하게 되면서 대화라고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 아침에 잠시 국제전화로 목소리를 듣는 게 전부가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사는 것이며 사람 관계며 잘 물어보셨지만, 아버지는 “잘 지내냐? 밥 잘 먹고? 그럼 됐다. 끊자. 전화비 나온다.” 하는 식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방학을 이용해서 더욱 자주 들어오려고 했고, 전화도 더 자주 드리려고 했지만, 이때만큼 간절하게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상태가 호전되어서 일반병실로 올라갔지만, 담당 의사는 우리 자녀들에게 먼저, 그리고 그다음에는 아버지에게 차분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직장과 가정이 있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나는 학기가 끝나고 방학에 맞추어 들어온 터라 내가 아버지와 온종일 한 달을 함께하게 되었다. 병실에서 아버지 좋아하시는 누룽지도 만들어 드리고, 부축도 해 드리고, 그리고 미처 정리하지 못하신 일에 대한 말씀도 들을 수 있었다.
평생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마지막 한 달의 대화는 그보다 더 깊고 큰 울림이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나를 잘 아시는 분이라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나는 아버지에 대해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여정 가운데에서,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 내가 알고 있던 누구에게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 하셨던 행동의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예전의 강단 있고 명확한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조용하면서도 사색의 끝에 나오는 말씀들은 참 귀했고, 더욱이 오늘이 마지막 말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나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있는 이메일 계정에 가끔 들어가 본다. 그 계정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글이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은 용량도 더 크고 기능도 많은 이메일을 사용하고 있지만, 오래된 이메일 계정은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찾아가는 고향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에게 위로해 줄 이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 가끔씩 그 오래된 이메일을 열어본다. 그 이메일들은 '아들아, 잘 지내고 있느냐. 나는 잘 지내고 있다.'로 시작하고,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으며, 잘 될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으로 자식에게 알리지 못하는 상황이 그 이면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슬픔과 그리움은 더욱 커진다.
나는 오래된 폴더폰을 아직도 갖고 있다. 색은 바랬고 긁힌 자국도 많지만, 다시 받을 수 없는 문자를 몇 개 간직하고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서랍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아들아, 생일 축하한다. 우리는 네가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몇 번을 가르쳐 드려서 겨우 문자 보내는 방법을 터득하셨기에 얼마나 정성 들여 한 글자 한 글자 누르셨을지 상상이 간다. '아버지, 잘 낳고 잘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계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흔히 할 수 있는 답장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계시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추운 훈련소에서 바짝 긴장해 있던 시절에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큰 위로를 받은 기억이 있다. '아들아, 나는 네가 장성하여 군대에 간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내가 지켜온 나라, 네 형이 지켜온 나라, 너도 잘 지켜가리라 믿는다. 밥 잘 먹고…' 간결하지만 강한 힘이 묻어있는 필체가 군 생활 내내 머릿속에 남았고, 힘든 훈련과 다사다난한 부대 생활에도 아버지의 말씀은 큰 힘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천국에 가신 지도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며, 그분의 말씀과 흔적은 내 삶의 도처에 남아 있다. 내 아버지께서 남기신 사랑의 표현처럼 나도 묵묵하고 꾸준한 사랑의 언어로 다음 세대에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리라 꿈꾸며 다짐해본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향한 곳은 집이 아닌 병원이었다. 그렇게 도착해서 병상의 아버지와 나눈 대화의 방법은 종이와 펜을 통해서였다. 의료장비로 기도와 입을 고정시켜 놓아서 아버지는 말씀을 못 하셨다. 그래도 작은아들이 왔다는 것, 아들을 보고 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매우 반가워하셨고, '집 어디 어디에 가면 너 좋아하는 곶감이 있다.'는 밝은 언어로 나를 안심시키셨다.
나는 행복하게도 아버지와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고, 모든 좋은 일과 고민을 이야기하고 지낼 만큼 살가운 관계였다. 그러다가 내가 외국 생활을 하게 되면서 대화라고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 아침에 잠시 국제전화로 목소리를 듣는 게 전부가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사는 것이며 사람 관계며 잘 물어보셨지만, 아버지는 “잘 지내냐? 밥 잘 먹고? 그럼 됐다. 끊자. 전화비 나온다.” 하는 식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방학을 이용해서 더욱 자주 들어오려고 했고, 전화도 더 자주 드리려고 했지만, 이때만큼 간절하게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상태가 호전되어서 일반병실로 올라갔지만, 담당 의사는 우리 자녀들에게 먼저, 그리고 그다음에는 아버지에게 차분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직장과 가정이 있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나는 학기가 끝나고 방학에 맞추어 들어온 터라 내가 아버지와 온종일 한 달을 함께하게 되었다. 병실에서 아버지 좋아하시는 누룽지도 만들어 드리고, 부축도 해 드리고, 그리고 미처 정리하지 못하신 일에 대한 말씀도 들을 수 있었다.
평생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마지막 한 달의 대화는 그보다 더 깊고 큰 울림이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나를 잘 아시는 분이라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나는 아버지에 대해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여정 가운데에서,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 내가 알고 있던 누구에게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 하셨던 행동의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예전의 강단 있고 명확한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조용하면서도 사색의 끝에 나오는 말씀들은 참 귀했고, 더욱이 오늘이 마지막 말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나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있는 이메일 계정에 가끔 들어가 본다. 그 계정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글이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은 용량도 더 크고 기능도 많은 이메일을 사용하고 있지만, 오래된 이메일 계정은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찾아가는 고향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에게 위로해 줄 이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 가끔씩 그 오래된 이메일을 열어본다. 그 이메일들은 '아들아, 잘 지내고 있느냐. 나는 잘 지내고 있다.'로 시작하고,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으며, 잘 될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으로 자식에게 알리지 못하는 상황이 그 이면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슬픔과 그리움은 더욱 커진다.
나는 오래된 폴더폰을 아직도 갖고 있다. 색은 바랬고 긁힌 자국도 많지만, 다시 받을 수 없는 문자를 몇 개 간직하고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서랍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아들아, 생일 축하한다. 우리는 네가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몇 번을 가르쳐 드려서 겨우 문자 보내는 방법을 터득하셨기에 얼마나 정성 들여 한 글자 한 글자 누르셨을지 상상이 간다. '아버지, 잘 낳고 잘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계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흔히 할 수 있는 답장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계시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추운 훈련소에서 바짝 긴장해 있던 시절에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큰 위로를 받은 기억이 있다. '아들아, 나는 네가 장성하여 군대에 간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내가 지켜온 나라, 네 형이 지켜온 나라, 너도 잘 지켜가리라 믿는다. 밥 잘 먹고…' 간결하지만 강한 힘이 묻어있는 필체가 군 생활 내내 머릿속에 남았고, 힘든 훈련과 다사다난한 부대 생활에도 아버지의 말씀은 큰 힘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천국에 가신 지도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며, 그분의 말씀과 흔적은 내 삶의 도처에 남아 있다. 내 아버지께서 남기신 사랑의 표현처럼 나도 묵묵하고 꾸준한 사랑의 언어로 다음 세대에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리라 꿈꾸며 다짐해본다.